할머니를 위해 빈 병 줍는 우영이
방바닥에 널브러진 고지서가 보인다. 얼마나 만졌던지 오른쪽 위 모서리가 바랬다. 매달 찾아오는 고지서에는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 적혀있었다.
언제부턴가 종이 위에는 숫자가 아닌, 지난날의 후회가 비췄다. 형광등도 잘 보라는 듯 방안을 밝게 비춰준다.
고지서에 다시 손이 다가선다. 바래진 부분을 찾아간 손가락이 지장을 찍듯, 종이를 지그시 누른다. 잠시의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 반달눈을 한 소년이 웃고 서있다.
어깨에 들쳐맨 책가방이 묵직해 보인다. 공부도 열심히 하는 듯하다. 한편에 책가방을 내려놓은 소년은 "할머니"를 외치며 뛰듯 다가섰다. 잘못하다간 몸을 부딪힐 기세다.
고지서를 보던 사람은 할머니였던 것이다. 다가선 소년은 손자 우영이였다. 우영이는 인사도 생략한 채 할머니의 몸뒤로 간다. 어깨를 주무르기 위해서다.
할머니는 괜찮다라며 말려 보지만, 우영이는 막무가내로 주무르기 시작한다. 할머니의 엄지손가락은 힘이 빠진다. 그렇게 지난날의 후회가 바닥에 떨어졌다.
우영이는 할머니의 유일한 삶의 원동력이다. 또, 하나 밖에 없는 손자다. 우영이에게도 하나밖에 없는 할머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는 태양 같은 존재다.
단 둘이지만 가족이라는 단어를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어깨를 주무르던 우영이는 할머니의 앞에 앉았다. "손이 아픈건가?" 아니었다. 자신의 다리 위에 할머니의 다리를 얹는다.
그렇게 할머니의 다리를 또 주무른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아플 법도 한데 미소가 끊이지 않는다. 할머니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지긋이 바라본 손자의 모습이 너무도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슬픔의 눈물이 차오른다. 모든 게 부족하기만 한 생활이 손자를 착하게 만든 것 같아 죄스러웠다. 차라리 좀 못돼서 할머니를 미워했으면 마음이 편하련만.. 우영이는 그저 좋단다.
할머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영이는 애교를 떨어댄다. 할머니는 그저 말없이 우영이를 바라보며 듣고만 있었다. 그렁그렁한 눈물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했다.
우영이의 뜨거운 눈물
그때, 우영이는 갑자기 일어서더니 책가방을 들고 온다. 한눈에 보아도 가방은 책이 가득 차 보였다. 들고 오는 모습도 무거워 보인다.
시험점수라도 자랑하려나 보다. 하지만, 우영이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시험지가 아니었다. 소주병이었다. 그 모습을 본 할머니는 태연하게 바라본다. 자주 겪는 일 같아 보였다.
한 병, 두 병, 세 병.. 우영이는 숫자를 세며 소주병을 꺼냈다. 그러면서, 밝게 웃으며 외치듯 말한다. "할머니! 3백 원 벌었어! 이거 팔면 3백 원이야!" 할머니 주려고 가지고 왔단다.
돈 때문에 힘든 할머니를 돕기 위해서였다. 눈물 맺혔던 할머니의 눈은 갑자기 무섭게 변했다. "빈병 주으러 다니지 마! 돈 걱정은 할머니가 해!" 방금 전까지의 웃음꽃은 온대 간데없었다.
순식간에 방안은 냉기가 흘렀다. 할머니의 호토에 우영이는 고개를 푹 숙인다. "할머니를 위해서 그런 건데.." 서운함과 섭섭함에 우영이의 눈물이 손등에 떨어졌다.
할머니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저며온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매일 빈병을 주우러 다닐 것이다. 그 시간에 공부해서 많이 배워야 하는데 말이다.
할머니는 빈병을 줍는 우영이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까 걱정됐다. 또, 친구들의 놀림을 받지는 않을지.. 할머니는 손자 걱정에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손자의 큰 사랑은 감히 비유할 크기가 없었지만, 화를 내야만 하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가슴으로 느낀 것과 입으로 나오는 말은 달라야 했기 때문이다.
왜 우리 가족은 받은 사랑을 다시 사랑으로 주지 못하는 걸까..
때로는 사람은 누구보다 위하는 마음이 서로를 멀게 하는가 보다. 속마음을 먼저 말하고 행동하지 않은 오류일 것이다. 우영이가 빈병을 줍기 전 할머니에게 말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할머니도 이런 저러한 이유 때문에 "병을 줍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미리 설명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는 된다. 서로에게 먼저 말을 꺼내기에는 너무 많은 눈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픔을 나누기보단 기쁨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겠지. 그날 밤 할머니와 우영이는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 채 하루가 저물어 갔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부끄럽지 않아요
다음날 새벽 동이 떴다. 할머니는 길을 나선다. 굽은 허리와 절뚝이는 발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한다. 할머니의 손이 움직인다. 손을 대기라도 하면 얼어붙을 것 같은 쇠 손잡이였다.
겨울밤 새벽 내내 눈보라 속에 있던 리어카 손잡이다. 이렇게, 할머니의 손은 낮에는 고지서 밤에는 리어카로 향한다. 할머니는 동네 폐지를 줍는다. 날이 저물 때면 하루종일 모은 폐지가 30kg이나 된다.
가벼운 종이가 30kg 무게가 되려면 산처럼 쌓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삶에 무게에 비하면 가벼웠나 보다. 매일 등에 산을 업고 길을 거닌다.
이렇게 고된 하루지만, 30kg의 폐지는 돈으로 바꾸면 1,500원이다. 그런데도 할머니가 계속 폐지를 줍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영이 때문이었다.
최소한의 생계비는 부족한 수급비로 해결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영이가 준비물을 못 사가 창피를 당할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본인께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손자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의 1,500원이란 돈이 세상 그 무엇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또, 부모보다 큰 사랑에 감동된다. 한편, 우영이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고 있다.
어젯밤 할머니에게 호되게 혼났지만 또다시 길거리를 살핀다. 빈 병을 줍기 위해서다. 우영이에게 빈 병 찾기란 너무 쉬웠다.
여기저기 버려진 쓰레기들 틈에는 언제나 술병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싱글벙글이다. 그렇게 책가방엔 오늘도 빈 병을 가득 채웠다.
그러던 중 길을 지나던 한 어른이 딱하게 여겨, 우영이에게 물었다. 빈 병과 폐지를 줍고 다니면 부끄럽지 않으냐고.. 우영이는 대답했다. "왜 부끄러워요! 저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요!"
할머니는 손자의 자존심을 지켜주려 오늘도 얼음장 같은 리어카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손자는 할머니를 위해 어린 나이임에도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할머니와 손자의 사랑이 더는 고된 길이 되지 않기를 기도 합니다. 또, 우영이의 손엔 빈 병이 아닌 볼펜이, 할머니의 손엔 리어카 손잡이가 아닌 따뜻한 악수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가족의 사랑이 돈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준 우영이의 가정에 축복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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